2016년 1윌 경기 이천시의 오리온 제과공장에 큰불이 났다.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공장 4개 동과 내부 설비 등이 전소됐다. 당장 이천공장에서 생산하던 오징어땅콩 등 주력 제품의 생산이 중단됐다. 직원들은 동요했다. 1956년 풍국제과를 인수해 창립한 오리온 역사상 가장 큰 위기라는 얘기까지 나왔다.
허인철 오리온그룹 부회장의 생각은 달랐다. 오래된 생산라인을 새롭게 재정비하고, 생산량까지 늘릴 기회로 봤다. 그는 이미 벌어진 일을 안타까워하기보다 발 빠르게 움직였다. 이천공장에서 생산하던 제품 물량을 익산과 청주공장으로 옮겨 4개월 만에 생산을 정상화했다. 늘 생산량 부족에 시달리던 오징어땅콩 설비를 증설해 기존 대비 생산량을 30% 늘렸다. 위기를 기회로 바꾼 허 부회장의 리더십을 보여주는 일화다.
제품의 겉모습만 그럴듯하게 만드는 과대 포장을 줄이고, 과자량을 늘렸다. 비용이 많이 드는 TV 광고는 과감하게 접었다. 초반 내부에선 반발이 나왔다. 유통회사(이마트)에서 ‘굴러온 돌’이 제과업 사정을 모르고 무리수를 둔다는 얘기도 들렸다. 하지만 허 부회장은 업의 본질에 초점을 두고 군살 빼기에 몰입했다. 포장재 줄이기뿐만 아니라 계열사 합병, 원·부재료 통합 구매,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재고 관리 등을 통해 아낀 비용을 제품 연구개발(R&D)에 투자했다. 오리온의 제품이 소비자 사이에서 ‘착한 과자’라는 별명을 얻게 된 결정적 계기다.
허 부회장은 ‘싸게 팔겠다’는 원칙을 고집스럽게 지키고 있다. 올 들어 해태제과, 롯데제과 등 경쟁사는 물론 라면, 유업계 등 식품업계가 원자재 가격 상승을 이유로 앞다퉈 제품 가격 인상에 나섰다. 오리온만 예외였다. 오리온은 지난 8월 ‘나홀로 가격 동결’을 선언했다. 줄줄이 이어지는 인상 움직임에 편승하면 더 많은 이익을 남길 수 있지만 허 부회장은 업의 본질을 되뇌며 가격 동결을 택했다. 그는 “가격을 올리지 않고도 이익을 내는 것이 오리온만의 핵심 경쟁력”이라고 말했다.
신입사원 채용에도 적극 나섰다. 주요 대기업이 공채를 폐지하고 있지만 오리온은 매년 30~40명의 신입사원을 선발하는 공채를 유지하고 있다. 주요 대기업이 취업 문을 좁힐수록 오리온엔 좋은 인재를 유치할 기회가 된다고 생각해서다.
인재 유치를 위해 보상 체계를 손보고 기업문화 개선에도 힘쓰고 있다. 군살 빼기를 통해 늘어난 이익을 직원에게 돌려줬다. 허 부회장 취임 이후 직원 임금은 연평균 7%가량 올랐다. 각종 성과급과 상여금 지급 제도도 새롭게 마련했다.
해외 사업은 철저한 현지화를 원칙으로 내세웠다. 이 원칙은 오리온이 글로벌 제과기업으로 변신할 수 있었던 비결로 꼽힌다. 현지 사업은 되도록 현지인에 맡겼다. 국내에서 파견하는 주재원보다 현지인이 현지 문화와 시장을 훨씬 잘 이해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오리온의 주력 해외 시장인 중국의 마케팅 담당 직원은 모두 현지인이다. 한국에서 파견하는 주재원을 이전보다 60%가량 줄였다. 이를 통해 현지 인력의 권한을 확대했다.
허 부회장은 간편대용식, 음료, 바이오 3대 신사업에도 시동을 걸었다. 앞으로 식품과 바이오의 경계가 무너지고 ‘건강’이 글로벌 식품시장의 핵심 화두가 될 것이란 판단에서다. 그는 “오리온이 글로벌 제과기업을 넘어 매출 10조원 규모의 글로벌 종합식품기업으로 도약하는 기반을 닦는 것이 전문경영인으로서 나의 임무”라고 강조했다.
■ 허인철 오리온그룹 부회장 약력
△1960년 마산 출생
△1980~1986년 연세대 경영학 학사
△1986년 삼성그룹 입사
△2006년 신세계 경영지원실장(사장)
△2012년 이마트 대표(사장)
△2014년 오리온그룹 부회장(총괄부회장)
△2017년 오리온홀딩스 대표(총괄부회장)
글=박종관/전설리 기자
사진=신경훈 기자 pj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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